2016年02月

〔대동칼럼〕‘제재’? ‘참수작전’? 해보라지―북에서는 비웃는다

145482219015_20160208


오늘 원쑤들의 발악은 극도에 달하고있다. 압박과 제재에 중독된 미국의 대조선압살책동은 이미 한계점을 넘어섰다. 민족반역자, 특등매국노인 남조선괴뢰패당까지 야합하여 동족대결의 핵도화선에 불을 달려고 미쳐날뛰고있다. 새해벽두부터 하늘과 땅, 바다에서 우리를 겨냥한 전쟁연습소동의 불구름이 일고 최후의 승리에로 나아가는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아보려는 원쑤들의 발악은 사상 최대의 폭과 규모에서 감행되고있다.

우리는 기적과 앙양의 70일의 승리로 악착한 원쑤들의 머리우에 복수의 불벼락을 퍼부을것이다.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 주체의 핵강국, 위성강국인 우리 조국을 세상이 보란듯이 경제강국, 사회주의문명강국으로 번쩍 받들어올리는 결정적인 승리의 도약대를 마련할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혁명의 상승주로에는 하나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평온한 날이 아니라 준엄한 날에 혁명이 더 힘차게 전진하였다는것이다. 원쑤들이 발악할수록 혁명은 더 세찬 폭풍기상을 안았다.

원쑤들의 발악은 극도에 달하여도 우리의 전진은 순간도 멈춰세울수 없다. 우리는 70일전투의 승리로 만리마를 타고 더 겨세차게 나래쳐오를것이며 원쑤들의 간악한 제재와 봉쇄의 포위망에 결정적파렬구를 내고 최후승리를 위한 기적과 비약의 도약대를 자랑스럽게 마련할것이다.

―〈노동신문〉 2016년 2월 25일부에 실린 정론 ‘70일전투의 승리자가 되자’에서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과거사이겠는가? 2

―강제병합 100년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


2. 일본의 과거청산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① 일본이 해야 할 과거청산과 그 현 주소


재삼 강조하건대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지배가 없었더라면 이 지역이 전후처리의 마당이 되지 않았으며따라서 그것이 발단이 되어 오늘과 같은 분단에로 이어지는 일 또한 없었다말하자면 100년전의 강제병합이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이 지금과 같이 분단의 고통과 비극을 겪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반성과 과거청산은 당연히 이 문제까지 염두에 두고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면 일본의 도의적 의무이기도 하는 이같은 반성과 과거청산은 얼마나 실행되었는가?

일본 당국은 요즘에 와서 겨우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으나 이는 아직 똑똑히 실천되지 못하고 있으며자기들의 대조선 식민지지배가 지금의 분단에로 이어졌던 책임에 대해서는 인정할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사실 패전 직후에만도 예컨대 일본에 미국으로부터 원조식량이 보내오게 되었을 때 당시의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수상은 미국에게 “이 귀중한 식량을 조센징(조선인)들에게는 먹일 수 없으니 남이거나 북이거나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일본 땅에서 추방해 달라”고 말했다또한 1950년에 6.25전쟁이 터지자 “이야말로 선우천조가 아닌가”고 기뻐했다 한다5뿐만 아니라 일본은 6.25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전6하기까지 했으며이 전쟁으로 ‘조선특수’라고 하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까지 챙겼다.


② 그릇된 정책의 근저에 깔려 있는 속셈

일본 당국은 조선 분단의 책임이 자기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서 반성·사죄하기는 커녕 오히려 분단된 한쪽()은 “유일합법정부”라 하고 또 한쪽()을 적대시하는 정책에 일관하게 매달려 왔다그리하여 분단이 반세기가 넘게 장기화되게 하는데 가담해 왔었다.

그들의 그릇된 정책은 1965년 6월의 ‘한일조약’에 근거하고 있는데일본이 미국의 의도에 따라 이 ‘조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이남의 군사독재세력과 흥정을 벌이는 과정에 스스로의 속셈과 목적을 여실히 드러냈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1961.5.16) 직후인 1961년 7월 22미국 대통령 케네디(당시)와 요트에서 회담했던 일본 수상 이케다 하야토(池田 勇人)는 “부산이 적화(赤化)되면 일본의 치안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때문제 남조선의 반공체제에 대해서 일본은 중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을 적극적으로 원조하고 싶다”고 말했다7.

그러면서 이케다는 “박 정권이 민주주의적인 정권이 아니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겠으나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백년하청이고 박은 이미 반공을 국시로 선언하고 있는 터인만큼 일본으로서는 박의 반공정권을 밀어줄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일본은 미국을 대신해 경제원조를 개시할 용의가 있다”고도 말했다 한다.

그후 박정희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기해 1961년 7월 4일에 ‘반공법’을 공포했으며케네디는 7월 29일 박 정권을 지지할데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그리고 몇해후인 1965년에는 ‘한일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이 ‘한일조약’을 통해서 어떤 목적을 추구했는가를 보여준 사실이 또 한가지 있다.

1958년 6월 11한일회담의 일본측 수석대표 사와다 렌조(澤田 廉三 당시 외무성 고문)은 회담에 임한 일본정부 대표단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38도선을 압록강까지 밀어 내고 거기에 (운명선을)설정하는 것은 일본 외교의 임무이며 또한 일한교섭의 목적이다. 38도선이 부산까지 내려 오면 일본의 앞길이 캄캄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8.

일본이 지금도 똑똑한 과거청산도 하지 않은채 분단된 조선()반도의 한쪽과만 관계를 맺고 또 한쪽은 적대시하는 것과 같은 그릇된 정책에 계속 매달리고 있는데그 바탕에는 ‘한일조약’에 임했던 그들의 속셈다시 말해서 ‘부산적기론’(釜山赤旗論)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기 때문에 2000년에 평양에서 남북 수뇌들이 만나고 6.15공동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이를 좋게 생각할리가 만무했다.

사실 평양의 비행장에서 양 수뇌가 손 잡던 순간서울의 프레스센터에서는 각국의 기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는데 유독 일본 기자들만은 기립박수를 안했으며그후 6.15공동선언에 의해서 민족적 화해와 단합의 기운이 급속히 높아가던 가운데 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 선수들이 ‘통일기’를 앞세우고 공동입장했을 때도 일본의 언론만은 “남북 양국 선수들은…”하면서 이 장면을 내보냈다.

아마도 그들은 이남의 현 정부에 의해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이 부정되고 남북관계가 과거의 대결시대까지 후퇴한 상황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리쉬고 있지나 않겠는지.


3. 〈글을 맺으면서〉 일본은 어째서 ‘백년숙적’ 소리를 듣는가

 2015121019588869

소위 ‘병합조약’에 대한 조인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1910년 8월 22일 저녁훗날에 초대 조선총독이 될 3대 통감 데라우치는 연회자리에서 “고바야가와가토고니시가 살았으면 오늘밤 저 달을 보고 무엇이라 했을고”(小早川加藤小西にあらば今宵をいかにるらん)라는 노래를 읊었다 한다.

그가 이때 이름을 부른 3명은 도요도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조선침략으로 일어난 임진왜란(1592∼1598)때 조선에 출병했던 일본의 사무라이대장들인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와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였었다요컨대 데라우치는 그들이 이루지 못했던 조선정복을 자기가 해냈다고 노래를 읊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반세기 이상일제의 패전으로부터는 근 20년이 지난 1962년 2당시 일본 수상 이케다는 미국에서 케네디를 만나고 돌아와서는 “우리 일본은 이토 히로후미(伊藤博文)의 길을 따라 다시한번 조선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고 말했다9.

흔히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반세기나 사이에 둔 두 사람의 노래와 발언이 이렇게도 흡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도요도미의 조선침략을 미화한 일제의 사고는 일본의 정부당국자나 정치가들에게 이어지고 있으며그것이 오늘까지 과거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려는 폭언이 되어 당국자들이나 정치가들 입에서 내뺃어진 일도 한두번이 아니다또한 일본에서는 역사에 대한 왜곡이 지금도 공공연히 진행되고 있다.

참으로 1970년 나치의 희생국이었던 폴란드의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에서 당시의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끓은 장면과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그래도 일본의 당국자와 생각 없는 사람들은 우리 겨레가 피맺힌 원한을 품고 일본을 “백년숙적” 이라고 하는 까닭을 모르겠는가?

일본에서 현직 수상이 자기들의 과거에 대해서 반성하며 사죄하겠다고 말한 것은 해방후 50년만의 일이었다

일본에게 있어서는 종전이 아닌 패전 50년이 되던 1995년 8월 15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 富市수상은 『전후50주년의 종전기념일에 즈음해서』라는 성명(통칭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고 일본이 멀지 않은 과거의 한때 잘못된 국책에 의해서 식민지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특히 아시아 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끼친데 대해서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속으로부터 사죄의 뜻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또한 1990년 이후라야 분단된 한쪽()과만 거론해 왔던 과거청산 문제를 북쪽과도 거론하게 됨으로써 1990년의 조선로동당과 일본의 자유민주당사회당 사이의 ‘3당공동선언’과 2002년 9월의 ‘조일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되게 되었다.

그런데 조일 양 수뇌들이 2002년에 공동선언을 통해서 이루어냈던 과거청산과 현안문제 해결에 의한 양국관계 정상화의 약속은 일본측에 의해서 이 합의중의 한 측면인 현안문제(납치문제)만이 극대화되거나 과거청산이나 관계정상화가 돈문제로 왜곡되는 등 때문에 지금도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일본의 대조선 식민지지배가 오늘의 분단에로 이어진데 대한 반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2009년에 일본의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새로 등장한 지금의 민주당 정부는 위의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할 것이며 ‘조일평양선언’에 따라 양국관계를 정상화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다(하토야마 전 수상). 그런데 상황은 이전과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뿐만 아니라 현 일본 당국은 결국 유엔 안보리(7.9)에서도 애매모호한 의장성명 밖에 내놓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침몰사건을 북의 소행으로 몰아붙이려 했던 세력의 주장에 남먼저 동조해 나서거나 고등학교 무료화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하려 하는 등 선임자의 대북 적대시정책과 전혀 다름이 없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해방직후 조선에서는 대중들속에서 “미국을 믿지 말라소련에 속지 말라일본은 일떠선다”는 말이 돌아갔다고 한다

강제병합 100년에 즈음해서 일본 당국은 그때 조선의 민심특히 “일본은 일떠선다”는 말이 이제는 과거사가 되었는지 어떤지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2010.8.15)

〈통일뉴스〉 2010.8.20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과거사이겠는가? 1

 

―강제병합 100년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



강민화 (대동연구소 소장)


들어가며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으로 우리 민족이 식민지 망국노의 운명을 강요당하게 된 치욕의 날로부터 100년이 지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필자가 1910년 8월 22일의 ‘병합조약’에 따라 같은 해 8월 29일부터 실시되었다고 하는 ‘한일병합’에 대해서 ‘강제병합’이라고 하는 것은 이 ‘병합’이 일방의 힘(무력)에 의해서 강요된 불법무효의 것이기 때문이다1.

식민지란 본국 인구의 이주와 이주민에 의한 개척이 합쳐진 의미의 그리스어 ‘코로니아’(colonia)에 유래한다고 하는데근대에 와서는 어떤 나라 주민들이 다른 나라에 이주해서 그곳을 정복함으로써 형성되는 지역이라는 뜻으로 속령(dependency) 또는 새로 획득한 영토(territory) 뜻하게 되었다

실지로 16∼17세기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는 유럽 이외의 지역을 정복하여 경제적 수탈정치적 지배의 대상으로 삼고 그 지역들을 식민지라고 불렀다. 이로써 식민지는 집단적 이주지와 다른 ‘이민족 지배지역’‘종주국에 종속된 지역’을 뜻하는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100년전의 강제병합으로 시작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지배는 이같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 피지배지역화라는 정도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 식민지지배는 당초부터 군사력에 의해서 강요된데다가 “조선인은 일본에 복종하든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위협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일본에게 영토를 점령당하고 자원을 약탈당하는 등의 정치경제적 종속에 머무르지 않고 주민들까지 인적 자원즉 노동력이나 심지어 성적 도구가 될 것을 강요당하고나아가서는 조선이라는 나라와 그곳에서 형성되고 살아 온 우리 민족의 말살이 추구된참으로 역사에 유례 없이 악랄하고 가혹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수 많이 거론되어 왔었다그래서 필자는 좀 다른 각도에서 이 강제병합 100년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지지배는 결코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시각이다.

왜냐 하면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피해를 끼쳤을 경우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저절로 과거사가 되는 것이 아니며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가해자에게 사죄할뿐 아니라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청산이 이루어진 과거사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은 지금도 일제에 의한 식민지지배의 연장선상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그것이자 해방후 조선()반도에서 반세기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는 지금의 분단과 그에 의한 고통이다.

그래서 필자는 강제병합 100년을 맞으면서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 나라우리 민족이 오늘과 같이 분단되지 않았다고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맟추어 보기로 한다.


1. 일본은 조선 분단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① 일제 식민지지배는 분단의 발단

11885190_893360754032270_7378583932754983576_n조선 분단의 책임이 일본에도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제의 식민지지배가 38도선에 의한 조선분할의 발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38도선에 의한 조선 분할은 당시의 미국 대통령 트루맨의 비준과 소련중국영국의 동의에 따라 맥아더가 내린 ‘일방명령 제1호’(1945.9.2)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정확히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대일참전을 선언한 소련의 급격한 남하에 불안감을 느낀 미국에 의해서 입안되고 추진된 것이었다

일본의 항복이 시간문제가 되었던 1945년 8미국은 일본 히로시마(8.6)와 나가사키(8.9)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이와 때를 같이 하듯 대일선전포고(8.8)를 했던 소련은 다음날에 조선에로의 진격을 개시했다그러자 일본은 드디어 스위스를 통해서 ‘포츠담선언’ 수락 의사를 표시(8.10)했다

이렇게 되자 아직도 자기 나라 군대가 오키나와에 머물러 있던 미국은 소련의 남하가 이대로 계속되면 자기들이 조선반도에 진출·개입할 여지가 없어질까봐 몹시 불안해 했었다그래서 미국에서는 8월 1011일에 국무성육군성해군성 합동조사위원회(SWNCC)를 긴급으로 소집되고 조선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하고 미소 양국이 일본의 무장해제를 분담할데 대한 문제가 토의되었다

이 분할안은 당시 미 육군 참모부에 있던 군인들인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훗날의 국무장관)와 챨즈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훗날의 주한유엔군 사령관)의 두명이 이미 명령을 받고 8월 10,  불과 30분 사이에 입안한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회의에서 채택되고 트루맨의 비준을 받은 다음 소련중국영국의 동의밑에 맥아더의 명령으로서 하달되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홀에서 당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 信行)가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조선을 점령했던 일본군이 최종적으로 항복한 것은 1945년 9월 9일이었다그후 38도선은 미국과 소련이 전후처리다시 말해서 항복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실시하는 분담 경계선이 되었으며그 북쪽에 있던 간토군(關東軍)관동군 부대는 소련군이남쪽에 있는 다이홍에이(大本營직할부대는 미군이 각각 맡았다.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으로 일컬어지는 트루맨 독톨린(1947.3.12)이 나오기 2년전에 벌써 조선()반도에서는 이처럼 미소 대립되는 구도가 형성되었으며그것이 지금의 분단에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당시 자기들의 패전이 시간문제었기 때문에 38도선에 의한 조선 분할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던 것처럼 말해 왔었다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역사학에는 ‘만약에’가 없지만만약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조선()반도가 전후처리 마당이 되지도 않았다따라서 이 전후처리 때문에 조선이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해서 분할되는 일도 없었으며이 38도선이 나중에 6.25전쟁을 겪은 이후 군사분계선이 되어 오늘처럼 분단상황이 굳어지는 일 또한 없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일본의 책임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으며그들은 이 식민지지배로 조선 분단의 발단을 만든 원인제공자로서의 책임도 함께 져야 하는 것이다.


② 38도선에 의한 조선 분할안첫 입안자는 일본


일본에 조선 분단의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38도선에 의한 조선 분할을 이미 전에 입안함으로써 사실상 해방후의 남북 분할을 유도했다고 하는 문제 때문이다.

물론 일본이 직접 38도선을 그었다고 하는 구체적인 물증은 현재까지 없다그러나 그들이 38도선에 의한 조선분할을 이미 전부터 입안했다고 하는 자료는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고시로 유키코(小代 有希子교수(동아시아문제 전공)가 1999년 미국에서 활동중에출간한 논문 『범태평양 인종주의와 미국의 일본 점령』(이하 고시로 논문)에는 일본이 패전 마지막 순간까지 ‘대동아 공영권’의 훗날을 기약하며 조선반도 분할을 상정하고 이를 위해서 기민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다2.

고시로 논문에 의하면 일본의 군국주의자들 내부에서는 벌써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1905) 당시부터 38도선에 의한 조선 분할안이 들먹거렸으며그것이 태평양전쟁에서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졌던 1945년초부터 구체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논문은 이같은 흐름에 결정적인 지침을 제공했던 배후 인물은 당시 일본군 해군 소장이자 종전 당시 일본 해군성 교육국장이었던 다카키 소키치(高木 )였다면서다카키는 1943년 이후 전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자 전쟁 조기 종결을 주장하며 적어도 겉으로는 ‘친영·미파 부전론자’로 행세했으나 뒤로는 패전 이후 예상되는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약화하기 위해 소련과 손 잡는 전략을 비밀리에 추구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도저히 항복의 조건을 내세울 형편이 못될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해서 만주를 포함한 조선의 이북을 관동군 지휘하에 두어 소련의 공격에 대비했으며, 38도선 이남은 다이홍에이직할 제17방면군 지휘하에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도록 했다고 논문은 지적했다.


③ 38도선 이남에서의 미군정길 안내자는 일본이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미국이 38도선 이남(인천)에 자기 군대를 상륙시킨 것은 패전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것이었다는 것은 명목에 불과했다

미국은 조선반도 이남(인천)에 상륙한 그날부터 일본인들뿐 아니라 이남의 동포들까지도 적국민으로 보고 군정을 실시했으며자기들의 군사적 점령을 장기화해 나갔다또한 그를 통해서 이남동포들이 자발적으로 내온 인민위원회나 진보단체들을 탄압하거나 강제해산시켰으며나중에는 비법적으로 이남에서만의 단독선거(1948.5.10)를 강행케 함으로써 하나인 우리의 국토와 민족을 완전히 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당시 미국이 추구한 목적은 전후처리도 아니고 해방된 조선의 진정한 독립도 아닌오직 자기들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서 이 땅에 통일된 민주주의 독립국가가 세워지지 않도록 자기들의 군사적 점령을 장기화하고 나아가서는 전 조선땅을 점령하는 것오직 이 뿐이었다3.

이는 결코 어제 오늘 지적된 문제가 아니다문제는 이남에 대한 이같은 미국의 군사적 점령이 전쟁에서 패하고 조선에서 당장 철수해야 했던 일본을 길 안내자로 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남에 주둔했던 미군의 사령관 하지는 1945년 9월 4휘하 24군단 장병들에게 “조선인들은 미국의 적으로 규정되며 따라서 항복에 부수되는 모든 조건을 이행할 의무를 지니는 한편 일본인들은 우리의 우호국민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는데이 말은 그대로 실천에 옮겨졌다.

미군의 인천상륙이 시작된 9월 8부두에는 총칼로 무장한 일본인 경찰이 정열했는데그들에게 미군을 환영하는 데모에 참가했던 조선인 두 사람이 사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그런데 하지는 치안유지에 협조해주었다고 오히려 일본인들에게 사의를 표시했을뿐 아니라 미국인 기자에게 “본관은 민간인들이 상륙작전을 방해할까봐 그들을 부두에 접근시키지말아야 한다고 명령해두었다”고까지 말했다.

또한 다음날인 9월 9일본군의 항복 의식이 끝나자 하지는 총독 아베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들과 조선인 직원들은 현직에 머무르고총독부는 종래대로 자기 기능을 계속하게 된다고 발표했다그리고 조선인들에게는 연설을 통해서 ‘인내’를 요구했다4.

패전직후의 일본에 머무르고 활동했던 미국 언론인 마크 게인(Mark Gayn)이 자기 저서 『JAPAN DIARY』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군은 해방자가 아니라 “상륙 첫날부터 조선인의 적으로서 행동”했는데이는 그 어떤 나라 내정문제에도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유엔헌장(27)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었다더욱이 일본은 패전국이면서도 이같은 위반행위의 길 안내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계속)


 


 


 


 


 


 


 


 


 


 


 

3.1 독립만세의 외침은 현재진행형이다 2

e-06people6

2. 3.1운동의 현재적 의미

 

1) 선열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현시기 나서는 과제는 무엇인가?

 

90년전에 독립 만세를 외쳤던 선열들의 뜻은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는 ‘ 3.1독립선언문’에 반영되었다이는 현 시점에서 볼 때 민족자주로 집약된다또한 3.1운동은 비록 그 결집의 도수에 있어서 제한성은 있었으나 이같은 자주독립의 뜻에 따라 특정 계급이나 계층에 머무르지 않는 각계각층 군중이 벌였던 거족적 항쟁이었다고 할 때 이는 민족의 대단결로 집약될 것이다.

이처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로 집약되는 정신이야 말로 3.1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3.1정신을 계승하고 애국선열들의 뜻을 이루자고 할 때 이를 위해서 현 시점에서 나서는 과제는 무엇이겠는가

더 말할 것도 없이 당면하게는 우리 민족의 자주권생존권을 짓밟고 위협하는 지금의 분단상황을 끝장내고 조국을 통일해야 하며또한 일본 당국이 과거 식민지통치에 대하여 우리 민족 앞에 사죄하고 그를 청산해야 한다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이 통일된 조국에서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며 누리게 해야 한다.

우리 나라는 3.1운동이 벌어진지 26년만인 1945년 8월 15일에 일제 식민지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그러나 이것으로 애국선열들의 자주독립의 뜻이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외세에 의해서 망국노의 고통을 강요당했던 우리 민족은 다시 외세에 의해서 분단의 고통을 겪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러한 의미로 우리의 통일 염원과 지향은 3.1운동에서 외쳐졌던 독립 만세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 민족이 분단상황을 한탄하고 그저 통일을 애타개 염원하기만 했던 시기는 이미 지났으며, 지금의 우리에게는 6.15공동선언이라고 하는 통일의 이정표와 그 실천강령인 10.4선언이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두 선언에 의해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가 펼쳐진 가운데 통일열차가 달리던 철길에는 두 선언을 외면하는 현 남측당국에 의해서 차단봉이 내리워졌으며, 과거의 대결시대에로의 회귀를 우려할만한 최악의 상황이 조성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남, 북, 해외를 막논하고 온 겨레가 분개하며 우려하고 있으며 남녘동포들속에서도 정부의 정책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재론하지 않는다. 다만 현 난국을 타개할 열쇠와 방도는 결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이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해서 3.1정신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

일본 당국이 과거 식민지지배에 대해서 우리 민족에게 사죄하고 그 과거를 청산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도덕적 의무이자 도리이다.

무슨 일을 저지르거나 문제를 일으킨 사람 스스로가 그 일이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는데 일본 당국에게 있어서 과거청산은 바로 그 결자해지이다.

그런데 해방후 6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과거청산이 똑똑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과거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본당국의 언동이 지금도 그칠줄 모르게 계속되고 있다이는 그들에게 책임의식과 반성의 의사가 전혀 없을뿐 아니라 그들이 과거의 침략적 야망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이는 작년 10월에 발생했던 ‘다모가미(田母神)논문’ 문제만 보아도 명백하다

일본 자위대 항공막료장 다모가미는 일본이 침략국이었다고 하는 것은 “누명”이라고 쓴 논문을 발표했다가 이 사실이 드러나 경질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 이후도 자기 주장에는 잘못이 없다고 배짱을 내밀면서 논문과 같은 취지의 주장을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시대착오적이며 무지한 그의 주장 자체도 문제이지만 일본 국내에는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여론이 결코 적지 않다는데서 세상사람들이 분격과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우리는 동족끼리 서로 다툼으로써 이같은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에게 어부지리를 주어서는 안되며,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그들에게 단호히 맞서 나가야 한다.

 

2) ‘민족·통일 건망증’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이남의 한 신문은 “세월이 지날수록 3.1운동이 하루의 공유일의례적인 기념일로 화석화되어가고 있어 가슴 아프다”고 썼다―경기북부일보 인터넷판 2008.3.1

또한 이남의 한 인터넷 언론은 최근에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증가되고 있다고 전했다. ―오마이뉴스 08.2.28

이남에서는 이전부터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과거의 유물처럼 보는 경향이 없지 않았으며요즘에도 민족은 “가공의 산물”이라거나민족주의는 배타적이며 심지어 “반역”이라면서 이를 배척하려는 주장이 있다물론 이것이 모두 민족이나 민족주의에 관한 서구이론을 잣대로 하는 논리나 주장들이라는 데 대해서도 여러 학자전문가들에 의해서 비판과 반박이 가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남에서는 이같은 ‘민족·통일 건망증(또는 불감증)’이 지금처럼 우려될만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사실 그같은 주장들이 행해지는 속에서도 사람들은 민족자주통일을 외쳤으며 이는 ‘6.15시대’에 들어 보다 활성화되었다그런데 어째서 다시 ‘민족·통일 불감증’이 우려될만한 상황이 되었을까?

이는 작년에 등장했던 이남의 현 정부가 “배타적 민족주의로는 남북문제를 해결할  없”으며 “남북문제는 민족내부 문제인 동시에 국제적 문제”라는 관점으로 민족문제나 통일(남북관계)문제를 대하는 한편, “한미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이 북한에도 도움이  것”이라거나, “역사인식은 일본이  일”이라며 일본의 과거사를 문제 삼지 않겠다고 말하는 등 민족보다 외세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같은 관점과 자세로 민족과 통일(남북관계)에 임하는 현 정부가 8.15를 광복이 아닌 ‘건국’이라고 하면서 이승만, 박정희의 ‘업적’ 운운하거나, 심지어 과거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미화하기까지 하는 〈뉴라이트〉의 이념적 뒷받침을 받고 있다고 하니 요즘의 ‘민족·통일 건망증’이 보다 조장될 우려는 충분히 있다.

이같은 경향을 극복할 과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이남의 진보, 통일 세력의 몫이며, 나아가서 남, 북, 해외 동포들을 망라하는 통일세력의 몫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가지 우려할만한 일이 있다. 그것은 작년부터 이남의 진보세력이 진통을 겪게 된 과정에 그때까지 진보·통일 운동을 함께 했다가 다른 ‘진보’의 길을 택한 사람들속에서 들려왔던, “민족지상주의”, “통일지상주의”라면서 마치 민족이나 통일이 진보와 대립되는 것처럼 말하는 주장들이다.

그들은 이같이 주장하는 근거로서 “신자유주의에 의한 경제위기는 민족주의 가지고 풀 수 없다”“지금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의 과제는 통일이 아니“며, “차라리 통일을  훗날 과제로 돌리더라도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들고 나오며, 심지어는 민족을 중시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것을 ‘종북’으로 내몰기까지 했었다.

이는 애당초 나라의 분단 자체가 평화를 위협하는 근원이라는데 대해서, 또는 민족·민족주의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는지 의심케 할만큼 조잡하기 그지 없는 주장들이지만문제의 엄중성은 이같은 주장이 본의든 아니든 ‘세계화’의 명분으로 민족보다도 미국, 일본과의 동맹관계를 중시하거나 “자유민주주의하에서의 통일이 (자기들의)최종목표”라면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전면 부정하는 현 당국이나 보수세력의 주장과 일맹상통한다는데 있다.

이것이야 말로 ‘민족·통일 건망증’의 극치이자 근본문제로부터의 도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왜냐 하면 그 근저에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민족적 자주권이 유린된 상황이야 말로 남녘 동포들의 모든 불안과 고통(여기에는 남녘 동포들이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인해서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문제도 포함된다)의 근원이라는 현실을 까맣게 잊었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자세가 깔려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년 봄부터 이남에서 끈질기게 벌어졌던 촛불시위는 과연 무엇이었는가이것이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때문에 생존을 위협받은데 대한 분노의 분출임은 틀림 없다그러나 동시에 이는 현 정부가 사람들의 생명안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미국산 쇠고기를 무작정 사들이기로 약속한데 대한 분노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려 놓은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의 자주독립의 뜻이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그것이 지금은 외세가 강요한 분단의 극복이라는 과제로서 엄연히 제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민족적 자주권과 관련되는 근본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그들의 주관적 의도야 어떻든 외세에 의해서 상요된 현 상황에 눈을 감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이남의 진보세력은 물론 남해외 통일세력에게 있어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뭉쳐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분열 양상을 보이는 것만도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데이처럼 ‘민족·통일 건망증’에 걸려 이 문제를 외면하고 배척하려고까지 하는 지금의 상황을 만약에 3.1운동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쓰러져 갔거나 그 뜻을 이어 나라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고귀한 한생을 바쳤던 선열들이 보았다면 땅을 치며 통곡했을 것이다또한 후대들 역시 그들을 두고 두고 원망할 것이다.

민족의 문제는 그들의 자주권생존권이 실현될 때까지 결코 낡은 것이나 지나간 것으로 될 수 없다우리는 3.1 독립 만세의 외침이 현재진행형임을 다시 확인하면서 이를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끝)

〈통일뉴스〉2009.2.28

3.1 독립만세의 외침은 현재진행형이다 1

e-07people4

강민화 (대동연구소 소장)





1919년 3월 1일에 일제 식민지통치에 대한 겨레의 쌓이고 쌍인 원한과 분노가 폭발하고 그들의 독립만세 외침소리가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날로부터 90년 세월이 흘러갔다.

해마다 3.1절을 맞을 때마다 애국선열들의 뜻을 기리며 그 뜻을 이루어내자고 다짐해 왔던 우리는 여기서 잠시 시계 바늘을 25년전까지 되돌려 보자. 1984년에 65번째 3.1절을 맞던 날 고 문익환 목사는 기념예배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애국선열을 찬양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우리들 자신이 모두모두 애국 투사들이 되어야 합니다.65년 전에 외친 자유와 평화를 이제 우리의 손으로 성취해야 합니다…그날은 언제입니까그날은 …휴전선을 철폐하고 통일된 완전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는 날입니다.” ―『문익환전집』4(사계절 1999.1.18), P266

그가 지금도 살아 있었다면 역시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과연 필자뿐이겠는가결국 3.1독립만세의 외침은 과거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이같은 시각에서 90년전의 3.1운동에 대해서 다시 돌이켜보는 동시에 애국선열들의 후손인 우리가 어떻게 하면 3.1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 운동주체의 시각에서 다시 보는 3.1운동과 그 역사적 교훈



1) 3.1의 애국선열은 누구인가?



모든 사회적 운동에는 그를 추동하는 주체가 있는 만큼해당 운동의 진상이나 면모를 알기 위해서는 누가 그 운동의 주체를 이루었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그러한 의미로 먼저 3.1운동의 주체다시 말해서 우리가 3.1절을 맞을 때마다 기리는 애국선열이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부터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

3.1운동은 그해가 기미년(己未年)이었기 때문에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도 불리운다.

당시 반일독립의 기운을 야수적으로 탄압하는 한편 ‘우민화정책’으로 상징되던 민족말살과 조선의 토지광산철도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을 독점함으로써 경제적 약탈을 마음대로 감행하던 일제의 식민지통치는 조선의 지식인학생종교인은 물론 노동자농민에 이르기까지 반일감정이 쌓이고 쌓이게 했으며그것은 1919년 1월 22일 황제 고종(高宗)의 갑작스러운 죽움을 놓고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유포되자 극도에 달했다이것이 3.1운동의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 3.1운동이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로 조선의 독립애국 운동이 여지없이 봉쇄된 조건에서 해외로 나가 또는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운동가들그들과 뜻을 함께 했던 종교인들이 모체가 되었던 ‘민족대표’라고 불리우는 인물들(이하·‘민족대표’)의 주도하에 벌어졌다고 보는 ‘선각자 중심’의 시각에서 적지 않게 거론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 ‘민족대표’들의 역할을 모두 부인할 필요는 없겠지만그렇다고 이같은 시각으로 3.1운동을 보는 것이 과연 정확하겠는가다시 말해서 우리가 3.1절을 맞을 때마다 기리는 애국선열이란 그들을 가리키는 것이겠는가

아니다. 3.1운동의 진정한 주체는 삼천리강토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던 노동자농민학생을 비롯한 조선의 백성들이다이들이 바로 지금도 우리가 기리는 애국선열들이다.

3.1운동은 민족대표들이 활동했던 서울뿐 아니라 전국적 규모에서 일제히 벌어졌으며나중에는 해외에까지 파급되었다그러면 이 독립만세 운동을 민족대표들이 통일적으로 이끌었을까또한 그들은 독립 만세를 외쳤던 군중에게 똑똑한 이념이나 방향을 제시해서 그들을 하나로 결집시켰을까

현 시점에서 우리는 이같은 잣대로 3.1운동을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다시 생각하는 3.1운동의 역사적 교훈



3.1운동은 조선의 백성들이 자주독립의 숭고한 뜻을 품고 일제가 휘두른 총칼에 맞섬으로써 억압 앞에서 저항할 줄 아는 우리 민족의 위상을 온 세상에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되었다그리고 이는 심각한 역사적 교훈도 남겼다.

지금까지 이남 같은데서는 3.1운동의 역사적 교훈에 대해서도 주로 ‘민족대표’들 중심의 시각에서 분석거론되어 왔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운동 주체의 시각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① 자주독립의 뜻은 이념적으로 결집될 수 있었는가?



당시 ‘민족대표’들은 ‘3.1독립선언서’를 준비하면서 여기에 첫째평화적이고 온건하여 감정에 흐르지 말 것둘째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조선의 독립이 절대 필요함을 강조할 것셋째로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이 전통정신에 입각한 정의와 인도의 운동임을 강조할 것 등의 내용을 담기로 했다이것이 지금까지 자주독립평화(또는 민족주의), 민주주의평화주의 등으로 집약화되어 3.1운동의 정신으로 알려져 왔었다그들은 또한 3.1운동을 계획하면서 독립운동의 원칙으로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세가지를 내놓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근본적인 제한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 제한성은 당시 민족대표들이 스스로의 이념을 갖지 못하고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기대를 걸었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난 후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은 1918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14개조로 된 전후처리 원칙을 제출하는데거기서 그는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을 제창했다그러나 그가 주장한 민족자결권은 영국프랑스의 반발에 부딪쳐 결국은 백인들에게만 적용되게 되었으며 그것도 법적 권리가 아닌 정치적 원칙으로만 다루어졌다.

더욱이 미국은 그보다 10여년이나 전에 이미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한 상태였었다. 1905년 7월 29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의 특사인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와 당시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太郎사이에서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승인하는 대신 미국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조선을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하겠다는 내용으로 맺어졌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족대표’들은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기대를 걸고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서 독립을 호소하려고까지 했던 것이다그 근저에 있은 것은 남에 대한 환상이자 의존심이었다.

결국 그들은 군중들의 자주독립의 뜻을 이념적으로 결집하지 못했다.



② 민족대표들은 어떤 방법으로 독립을 이루려 했는가?



당시 ‘민족대표’들에게서 나타난 제한성은 또한, 3.1운동에서 비폭력을 설교하면서 제국주의 일본에게 독립을 청탁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경향은 당시 독립운동의 분위기에 불을 당겼다고 하는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의 2.8독립운동(1919)과 그 준비단계에서 나타났다이를 주도한 학생들은 당초부터 일본정부에게 건의서를 내겠는가 아니면 독립청원서와 선언서를 동시에 발표하겠는가를 놓고 의견이 갈라졌으며그러한 가운데 1월 6일에 웅변대회를 개최했던 학생들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조선의 독립을 일본 내각과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에 청원할 것을 결의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찾고 있던 ‘민족대표’들은 윌슨의 민족자결론과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에 의한 ‘2.8독립선언’고종의 급서 등이 계기가 되어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3.1운동을 본격적으로 계획하게 되었다그런데당초 3월 1일 정오를 기해 서울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를 벌이기로 했던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적 인물들로 구성된 33명의 ‘민족대표’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경찰에 사전 통보해 놓고 이날 학생들과 군중들이 기다리는 파고다공원이 아니라 서울의 정각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거기서 선언서를 낭독하여 만세삼창을 부른후 자수했다.

이는 결국 제국주의에 대한 환상이자 투항이었다역사는 제국주의가 저들의 식민지를 스스로 포기한 예를 알지 못하며당시의 일제 역시 비폭력으로 맞섰던 시위 군중들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탄압했다남측 자료에 의하면 그로 말미암아 사망자수는 7,509부상자수는 1만 5,961구속자수는 4만 6,948명에 달했다 한다―인터넷 YAHOO·KOREA 『야후백과사전』



③ 독립항쟁에 나선 군중의 결집은 이루어졌는가?



우리의 민족사는 겨레의 운명이 민족적 단합에 기초한 주체역량의 강약에 좌우된다는 것을 한두번만 교훈으로 남기지 않았다이는 3.1운동에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삼천리강토 전역은 물론 나중에는 해외에까지 확산되었던 3.1운동은 노동자농민상인학생천도교와 기독교불교를 막론한 종교인 등 각계각층심지어 어린이와 거지기생들까지 참가했던 말 그대로 거족적인 반일독립항쟁이었다.

남측 자료에 의하면 3월 1일부터 수십일동안 계속되었던 항쟁기간중에 진행된 집회 횟수는 1,532참가 인원수는 202만 3,098명이나 되었다 한다―위와 같은 인터넷 『야후백과사전』에서

그러나 이처럼 전국적 규모에서 벌어진 거족적 항쟁에 참가했던 각계각층 군중은 자주독립 운동의 주체로서 하나로 결집되지 못했다.

이남의 한 전문가는 3.1운동이 “어떤 지도력에 의하여 인도되었다기보다는 전국민이 계층별남녀별지역별학력별연령별 할 것 없이 전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고 지적했다―『차석찬의 역사창고』사이트중 〈3.1운동〉

이는 결국 당시 ‘민족대표’들이 내걸었던 독립운동의 대중화일원화 원칙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은 몇가지 검증을 통해서 우리는 민족의 운명 개척은 민족 구성원들의 각양각색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포용하는 이념과 민족 구성원들의 확고한 결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3.1운동의 역사적 교훈으로 정리할 수 없겠는가.

(계속) 


 


 


 


 


 


 


 


 


 


 


 


 

記事検索
プロフィール

taedong

ギャラリー
  • 〔대동칼럼〕“트럼프의 친구”
  • 〔대동칼럼〕“트럼프의 친구”
  • 〔대동칼럼〕“2019년은 ‘김정은의 해’가 될 것이다”
  • 〔대동칼럼〕독후감 아닌 독후감
  • 〔대동칼럼〕준비를 마쳤다고?
  • 〔대동칼럼〕우리가 다시 확인하고 명심해야 할 일
  • 온 겨레의 공동재산이 된 민족자주
  • 온 겨레의 공동재산이 된 민족자주
  • 온 겨레의 공동재산이 된 민족자주
QRコード
QRコー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