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年08月

〔대동칼럼〕제재는 선수들의 의지까지 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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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 남북이 여자농구와 카누, 조정 등 3종목에 단일팀으로 출전했다.

이제는 국제스포츠경기에서 남북이 공동입장을 하고 단일팀을 구성하고 출전하며, 그들을 남과 북, 해외의 동포들이 “우리는 하나다!”고 외치며 성원을 보내는 광경에 모두가 당연한 일처럼 익숙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동포들의 기쁨과 환호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어졌다.

여자 농구에 출전한 단일팀 선수들이 후원사인 나이키로부터 유니폼을 제공받지 못하게 되었다. 나이키 유니폼을 단일팀 선수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유엔 안보리의 대조선제재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6.12조미공동성명에서 4.27판문점선언을 재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선언의 합의에 따르는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개설에 대해서 ‘대북제재 위반’ 운운해서 난관을 조성했더니 이번에는 국제 스포츠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입는 윤니폼에 대해서 문제삼았던 것이다.

애당초 로켓이나 인공위성을 발사했거나 핵시험을 했다고 해서 유엔 안보리의 제재대상이 된 나라는 오직 조선뿐이며, 따라서 이처럼 천만부당한 제재가 당장 해제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칠줄 모른다. 그런데 이 제재에 걸리면 한걸음도 전진 못하는 ‘제재만능’ 상황은 여전하다.

그로 말미암아 얼마전에는 조국에로의 수학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재일동포 학생들이 일본의 공항에서 기념품을 압수당하는 비인간적인 행위가 저질어지고 내외여론의 비난을 받은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이번에는 온 겨레가 박수를 보내는 남북 단일팀 선수들까지 피해를 입었으니 이는 벌써 제재의 범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부당하기 그지 없는 처사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을 달리 해보자.

비록 나이키 유니폼은 제공되지 않앉지만 선수들은 한국의 소규모 업체의 경기복을 입고 단일팀으로 당당하게 경기에 출전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카누에서 우승하고 여자농구 8강전에서 태국을 106 대 63으로 꺾었다.

결국 아무리 부당한 제재와 압력도 단일팀의 구성과 선수들의 활약까지는 막지 못했다.

4.27판문점선언과 6.12조미공동성명을 이행하려는 노력이 방해세력의 정항에 부닥쳐서 난관을 겪지만 그 누구에 의존함이 없이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확고한 정신에 따라 민족적 화해와 평화번영의 새 시대를 기어이 열어 나가려는 겨레의 의지가 다시금 과시된 셈이다. (K)


2018.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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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칼럼〕또다시 벌어진 눈물속의 만남과 기약 없는 이별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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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0일부터 22일까지 금강산에서 이산가족들의 상봉이 진행되었다.

60년 이상이나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가족, 친척들은 처음에는 “너무 좋다. 꿈같다.”고 서로 얼싸안았으며 그곳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런데 모처럼 만난 그들은 참으로 야속하게도 불과 이틀후에는 “같이 있고싶다. 안 보내고 싶다.”며 다시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말 그대로 기약 없는 이별이었다. 그래서 그곳은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산가족들의 상봉이야 남북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의의있는 일들가운데 하나이므로 그 자체는 소중하다.

그런데 마치 갈증에 걸린 사람에게 물 한 모금만 먹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람을 촉촉하게 하기는 커녕 갈증이 더해지고 오히려 안 먹이는 것보다 못하다. 이것이 30여년간의 이산가족 상봉의 장면을 볼 때마다 필자가 느껴온 바이다.

더욱이 이번 상봉소식을 보면 북에 있는 조카를 만난 할머니는 90세였으며 72세, 71세 두 딸을 만난 어머니는 99살, 71세 아들이 품에 안긴 어머니 역시 92세였다. 그리고 북에 있는 며느리(71)와 손녀(48)를 만난 아버지는 101세였으니 그동안 이산가족들이 더욱 고령화되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같은 문제들은 지금까지도 이산가족들의 상봉이 진행될 때마다 강조되어왔었다.

필자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싶은 것은 이번에 혈육과의 상봉이 이루어졌던 사람들은 남쪽식으로 이산가족이라고 불리우든, 혹은 북쪽식으로 흩어진 가족, 친척들이라고 불리우든 남의 나라 사람도 아니고 더욱이 남남도 아닌 육친들이라는 것이다.

가령 67세 여성이 처음으로 만난 노인은 89세되는 그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한 할머니가 만난 사람은 아기 때 헤어졌다가 73년만에 만난 그의 친동생이었다. 또한 단체면회 때 오열했던 남측의 86세 여성과 북측의 할머니(89)는 자매간이었다.

그런 가운데 89세 아버지가 71세 딸에게 한 말은 “살아줘서 고맙다”였으니 참으로 형언 못할만큼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들이 가족, 친척들이라는 이야기로 되돌아가 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산가족, 혹은 흩어진 가족, 친척들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해서가 아니라 나라의 분단때문에 본의아니게 강요당한 처지이다. 요컨대 하나인 강토와 민족이 외세에 의해서 갈라진 결과로 생긴 것이다. 그들이야 말로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분단 비극의 상징이다.
 
그런데 조국의 분단에서 이익을 얻거나 얻으려 하는 외부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소리이면 몰라도, 우리 민족 내부에서 이처럼 엄연한 사실을 한두번도 아닌 30여년도안이나 목격해 오면서 그동안 말로는 통일하자고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분단된 조국의 한쪽만을 우리 나라 혹은 조국이라고 부르거나 또 어떤 사람들은 조선(한)반도에 두개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라고 말하는, 참으로 한심한 일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가?

묻건대 분단된 절반만이 우리 나라 혹은 조국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남의 나라인가? 혹은 조선(한)반도에 두개 나라가 존재한다면 이번에 눈물로 만나고 눈물로 다시 헤어졌던 사람들은 서로 남남이거나 다른 나라 사람들인가?

혹시 필자의 이같은 말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반대로 묻고싶다. 당신은 지난 2월 평창올림픽 때 북측의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백두와 한나는 내 조국’이라는 노래를 부른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해솟는 백두산은 내 조국입니다
제주도 한나산도 내 조국입니다

바로 그렇다. 백두산(북)도 한나산(남)도 다 내 조국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인 조국이 외세에 의해서 분단되었기 때문에 통일하자는 것이지, 남북이 나라와 나라 관계라면 구타어 통일하자는 문제 자체가 제기되지도 않는다.

4월 27일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아무런 물리적 제약도 받지 않고 굳게 손잡고 함께 서로의 지역을 오갈 수 있은 것은 거기가 한 강토이라는 사실을 현실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24-26일에도 2차 상봉이 있게 되는데 그때도 이번과 같은 장면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근본적인 해결책이야 통일이지만, 통일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라도 이산가족들이 자유롭게 아무때든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K)


2018.8.22



전문가들(학자, 국회의원, 기자)이 말하는 미국의 대북정책

서울에서 발간된 책 『평화의 규칙』중에서

한국에서는 2018년 6월 정치학자인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와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이 6개월에 걸쳐 진행한 대담을 엮은 책 『평화의 규칙』(비틀비)이 발간되었다.
책은 “격변의 한반도, 새로운 미래는 어떻게 다가오는가”라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만큼 독자들이 올해들어 말 그다로 격변한 조선(한)반도 정세를 보는데서 참고가 되기를 바라지만 나는 여기서 책 자체에 대해서 소개를 하지 않는다. 다만 이 책중에서 미국의 대조선정책(책에서는 대북정책이라고 표기됨)에 관해서 진행된 대담 내용이 역사적인 4.27판문점선언과 그를 확인한 6.12싱가포르 조미공동성명발표이후 정세를 보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아래에 그 부분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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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평화의 규칙』의 표지(위)와 저자들(오른쪽으로부터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문정인 연세대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김치관 〈통일뉴스〉편집국장)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으로 떠오른 북한 핵

먼저 대담을 진행한 김치관 편집국장(이하 진행자)가 “어려운 (미국의)대북정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자고 말하자 문정인 교수(이하 문 교수)는 “아니 오히려 복잡하지 않습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대북 정책은 사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지금까지 거의 적대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아주 단순합니다. 봉쇄, 제재와 압박이 기본 축이었습니다. 최근에는 북한 핵무기로 인해서 제재와 압박이 유엔이나 국제적 차원으로 학대되고 수준이 높아진 게 변화라면 변화랄까. 미국은 한번도 이 기조를 바꿔본 적이 없어요. 중간 중간 약간 완화하려는 계기들이 있었지만 결국 흐름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이 볼 때 1990년대 초반, 핵 위기 발생 전까지는 북한은 남한에 대한 위협 차원의 지엽적 위협 세력이었죠. 지엽적 위협세력이란 현재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전력 차원에서 충분히 대처 가능한 수준이라는 겁니다. 1990년대에 오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는데, 냉전이 해체되면서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이 이루어졌잖아요. 한국은 그래서 유엔 가입과 함께 중국, 러시아와 국교가 수립되었는데 북한은 유엔 가입만 이루어지고 미국 및 일본과 수교가 이뤄지진 않았습니다. 수교가 안 되고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으면서, 사실 북한 입장에서는 균형이 깨진 겁니다. 미국은 그런 속에서 북한의 일차 핵 위기 때도 합의를 했지만, 뻔히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합의를 이행할 생각이 없었어요. 클린턴 정부의 국무부 관계자가 대놓고 이야기를 했어요. 1994년 7월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10월에 북미 제네바 합의를 했지만, 미국은 내심 북한이 길어야 3년에서 5년내에 붕괴할 것으로 생각했던 거죠. 뜻밖에도 북한이 굉장히 어려운 고난을 겪으면서도 생존에 성공하면서 현재의 북핵 위기가 온 겁니다.
전반적으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이해가 너무 낮아요. 특히나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우리 측 일부 보수적 인사들과의 교류만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북한에 대한 생각이 한국의 보수주의자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북한이 곧 붕괴할 거라는 ‘희망적 사고’, 북한은 악의 축이고 나쁜 놈들이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손을 좀 봐줘야 한다는 ‘집단 사고’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거죠. 다만 최근 북한 핵 문제가 장기화되고, 북한 핵이 고도화되면서 그 해법을 놓고서 미국도 백가쟁명(百家争鳴)상태로 변하고 있어요. 열 명을 만나면 열 사람 다 해법이 다른 상황입니다”

문 교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미국의 대북 정책을 이익과 가치 측면으로 나눠 봅시다. 이익 측면은 결국에 미국의 안보에 북한이 위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 이걸 보는 겁니다. 과거에는 미국이 좀 여유가 있었죠. 왜냐면 북한의 위협이라는 게 재래식 무력 수준이고, 주한미군과 한국에 대한 위협 차원이었거든요. 제한적이고 일이 터져도 틀어막을 수 있는 그런 위협이었죠. 그러다가 북한이 노동미사일 개발하고 나니 위협이 일본까지 미치는 거고 또 화성 15호 대륙간 탄도 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하니까 이제는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이 되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재래식 군사력의 위험을 넘어 핵위협이 되었고요. 본토에 대한 직접적 위협인 북한은 상당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이제는 북한이 미국의 외교정책 아젠다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오바마 정부 때만 해도 국가 안보전략 보고서에서 북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올라서, 트럼프 정부 안보 보고서에서는 열일곱 번이나 언급된단 말이에요.
두 번째로 가치의 측면을 살펴보면 민주주의나 인권 문제도 미국은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죠. 전통적으로 미국 민주당 정부는 이런 이슈들을 군사적 위협 못지않게 다뤘어요. 그러면서 북한을 백악시하고 상대조차 안 하려 했던 거죠. 지금 트럼프 대통령은 가치에 크게 역점을 두지는 않는데 의회는 여전히 이 문제에 주목해요. 북미 관계가 쉽지 않은 게 북한 핵 문제 하나에 우선순위를 두고 거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민주주의, 인권, 탈북자, 화생방 무기까지 다 이슈로 걸려 있어요. 요즘은 또 사이버 안보 문제도 나오죠.”

미 CIA가 북한 종말론에 매달리는 이유

다음으로 진행자는 과연 미국에는 북한 전문가들이 얼마나 있는지, 또한 그들이 북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서 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2012년 3월 초 뉴욕에서 남북한과 미국 그리고 독일이 비공개 회의를 한 일이 있었어요. 미국에서는 존 케리(John Fords Kerry) 당시 상원의원,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 대사가 참석했고 한국에서는 저하고 임동원 이사장, 북한에서는 ㄹ영호 당시 외무성 부상이 참석했죠. 그때 리영호 부상이 이런 말을 했어요. ‘미국이 2차대전 이후에 수교를 하지 않은 국가가 쿠바, 이란, 북한 이렇게 셋이다. 그런데 쿠바, 이란은 과거에는 수교했다가 단교한 케이스고 단 한번도 기회를 안 준 것은 북한 밖어 없다. 이는 불공정하다.’ 그러니까 존 케리 상원의원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수교를 하려 해도 상원에서 비준을 받아야 하는데, 북한이 지금과 같은 형태를 보이면, 상원의원 백명중에 단 한명도 동의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당신들 행태 바꿔라.’이렇게 대답해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얘기를 꺼낸 건데, 이런 사고방식이 미국 정치인들에게 지금도 지속되고 있어요. 상황을 역지사지해서 북한 내부의 입장도 고려하면서 접근하는, ‘내재적 접근’이라고 하죠. 그런 북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워싱턴 정가에 거의 영향력이 없어요. 이들은 북한의 모든 행동이 도발이라고 보지는 않고 미국이 원인을 제공하거나 잘못한 것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워싱턴의 주류는 북한 전문가들이 아니라 외교 분야의 제너럴리스트들입니다. 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고정된 상고방식으로 북한 문제를 판단하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는 거죠.
미국 정부에서 대북 정책의 영향을 미치는 주요 관계자들은 CIA의 분석국에서 북한 담당하는 분석관들, 국무부 정보연구실의 북한 담당자들, 그리고 국방정보본부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의 북한 담당 요원들 등인데 성향이 각기 달라요. 국무부는 비교적 객관적 분석을 하는 반면 CIA는 북한에 대한 적대적 분석이 강합니다. DIA는 주로 영상 또는 암호 정보 등 기술 정보에 의존하기 때문에 왜곡이 적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전반적으로는 한국말도 못하고 한글 문서도 못 읽으면서 목소리만 큰 제너럴리스트들이 워싱턴 정가를 주름잡는다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이 대북 정보 실패를 가져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이지요.”

문 교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아무튼 이런 매커니즘 속에서 미국 정부는 애초부터 반북적 사고가 강한 CIA 분석국 의견에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의 자서전 『역사의 파편들』을 보면 ‘미 CIA 최악의 정보 실패는 북한에 대한 분석’이라고 회고하는 부분이 나와요. 그레그 전 대사는 1951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CIA에 들어가서 1973년부터 1975년까지는 한국 지국장을 하고 1989년에 주한미대사로 부임했으니까 30년 이상 한국 정보를 다루었던 사람입니다. 북한은 폐쇄 사회니까 정보를 입수하기가 어렵찮아요. 그럼 더더욱 북한을 이해하고 제대로 공부한 전문가들이 필요한데, 보수적 의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CIA 분석국에서 북한 담당으로 일하고 거기서 나온 것들이 백악관과 국무부에 전달된다고 생각해봐요. 잘못된 정보가 들어가면 잘못된 결론이 나오는 거죠. CIA는 1991년부터 북한 붕괴론을 주장했습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에는 아주 단정적으로 북한붕괴를 예측했죠. 그 다음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에도 줄곧 북한 붕괴론을 주장했어요. 최근까지도 북한 붕괴론에 방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CIA 분석국은 언제가 되었든 북한이 붕괴되어 줘야만 자기들 분석의 정당성을 찾는 꼴이 된 거죠. 마치 종말론 예언하는 사람들 같아요. 종말론자들이 예정일이 되어도 종말이 안 오면, ‘아 우리 틀렸습니다’ 인정하던가요? 다시 날짜를 바꿔서 열렬히 종말을 설파하죠.”

이어서 홍 의원이 말했다.

“그런데 미국만 그러냐?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때 집중적으로 나타났는데, 전임 노무현, 김대중 정부의 통일 정책을 공격하고 북한 전문가들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통일부를 약화시키고 외교부로 통합시키려고 했던 것도 같은 차원입니다. 그러면서 북한 전문가들이 아닌 제너럴리스트, 일반 국제정치학자들이 대북 정책을 주도하게 하죠. 결국 한국의 보수 정부나 미국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북한 전문가가 아닌 제너럴리스트를 내세워 대북 정책에 임한 셈입니다.”

홍 의원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또 한 가지 미국 대북 정책의 큰 취약점은 정권 바뀔 때마다 정책의 연속성이 없다는 겁니다. 대개 미국 정부가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1970년대 이후에 민주당, 공화당이 대통령 임기 두 번씩을 집권하고 정권이 바뀌었잖습니까. 그러다 보니 어떤 현상이 벌어지냐면, 8년 중에 1기 4년을 북한에 대한 압박 공세로 일관해요. 그러다가 통하지 않으니 2기에 들어가서 뭔가 대화 국면을 모색하고 가시적인 결과를 만들려고 생각은 해보는데, 시간이 다 가고 임기가 끝나죠. 이게 한 패턴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패턴은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약속을 하면 안 지켰다고 생각을 하는데, 미국을 비롯한 다른 주변 국가들도 북한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게 상당히 많았어요. 꼭 약속을 안 지키려 했다기보다, 정권이 바뀌면서 자연히 무산되기 때문이죠. 선거를 통해 정권이 바뀌기 때문에, 지난 정부의 합의 사항이나 약속을 사실상 이행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클린턴 정부 때 했던 1994년 제네바합의, 2000년 10월 북미 공동성명도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2002년에 파기되었죠. 그냥 끝났습니다. 그 다음에 부시 정부하고 만든 합의도 오바마 정부 때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여러 경험이 겹치면서, 북한도 미국을 신뢰하지 않아요. 미국이 북한을 신뢰하지 않는 만큼이나.”

트럼프 재임 기간은 절호의 기회

진행자는 다음으로 북의 핵이 미국에 대한 실질적 위협 수준에 도달했으며, 또한 그간의 미국 대통령과 상당히 결이 다른 트럼프라는 인물이 대통령에 재임중이라는 환경변화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특성에서 어떤 변화의 계기가 만들어질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서 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북핵 문제나 한반도 상황을 타개하는데서, 새로운 모멘텀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미국 정계의 기존 가치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이외의 변화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는 그러면서 “그래서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을 북핵 문제, 한반도 문제와 북미 관계를 푸는 데서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홍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모두 정부 출범 초 북한 핵문제로 큰 위기와 도전을 맞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특히 좋은 점은 두 나라 대통령이 모두 임기 초반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취임 초반 북한 문제를 풀 시간을 날리고 정권이 교체되곤 하는 패턴이 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지금 북핵 문제로 인한 최악의 위기가 해결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면, 임기가 충분히 남았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 집권 중 북한과의 관계를 상당 정도 풀 수 있습니다.”

※저서의 “2부 우리는 지정학적 숙명을 벗어날 수 있는가”중 “2장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가능한 인물인가?”에서. 중간표제는 책에 쓰인대로 달았음. (대동연구소 소장 강민화, 2018.8.16 정리)


일본어 번역판

専門家(学者・議員・記者)が語るアメリカの対朝鮮政策

ソウルで出版された本『平和のルール』から

韓国では2012年6月、政治学者の文正仁延世大名誉特任教授と、洪翼杓共に民主党所属国会議員、金チグァン『統一ニュース』編集局長が6カ月にわたって行った対談の記録を収録した書籍『平和のルール』(ピトゥルビ)が発刊された。
この書籍が「激変の朝鮮半島、新しい未来はいかに近づいてくるのか」と自ら問題を投げかけているゆえ、今年に入ってから文字どおり激変した朝鮮半島情勢について読者が把握するのに役立つことを願うが、私はここで、この書籍そのものについて紹介する考えはない。ただ、このなかで、アメリカの対朝鮮政策(原文では対北政策となっている)に関する内容が、歴史的な4.27板門店宣言と、それを確認した6.12シンガポール朝米共同声明発表後の情勢を理解するのに役立つことを願って、そこの部分のみを紹介することに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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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和のルール』の表紙(上)と著者たち(下・右から洪翼杓共に民主党所属国会議員、文正仁延世大名誉特任教授、金チグァン『統一ニュース』編集局長)

アメリカ本土に対する脅威として浮上した北の核

まず、対談の進行役をつとめた金チグァン編集局長(以下・進行役)は、「むずかしい(アメリカの)対北政策」について話すことを提起した。これに対して文正仁教授(以下・文教授)は、「いや、むしろ複雑ではありません」とのべながら、つぎのように語った。

「実際、アメリカの対北政策は、北の政権樹立以後今日までほとんど敵対政策で一貫してきたため、非常に単純です。封鎖、制裁それに圧迫が基本でした。近頃は、北の核兵器のために制裁や圧迫が国連や国際的次元へと拡大してその水準が高まったことが変化といえば変化ともいえましょうが、アメリカは一度もこの基調を変えたことがありません。途中で若干緩和しようとするきっかけもありましたが、結局流れは変わりませんでした。
アメリカにとって北は、1990年代初めに核危機が発生する前まで、韓国に対する脅威という次元の、重要度の低い勢力でした。つまり、現在朝鮮半島に駐留している米軍の戦力で十分対処が可能なレベルでした。それが1990年代に入って状況が非常に変化するわけですが、冷戦が終結してから、南北が同時に国連に加盟しましたよね。韓国はあのとき国連に加盟するとともに、中国やロシアと国交を結びましたが、北は国連に加盟しただけで、アメリカや日本と国交が結ばれませんでした。実際、北の立場からしますと、修交が成されず外交関係が正常化しなかったためにバランスが崩れたわけです。そのようななかでアメリカは、北の第一次核脅威のときも合意しましたが、ご存じのようにそれを履行する意思がありませんでした。クリントン政権当時、国務省の関係者がはっきりといいました。1994年に金日成主席が死去して、10月に朝米ジュネーブ合意が成されましたが、アメリカは内心、北は長くとも3年から5年で崩壊すると考えたのです。ところが意外にも北は、きびしい困難に見舞われながらも生存に成功して、現在のような北の核危機が訪れたのです。
全般的に、北に対するアメリカの理解度が低すぎます。とくに先の李明博・朴槿恵政権のころには、韓国の一部保守的な人々とばかり付き合っていたために、北に対する考えが韓国の保守勢力と変わりませんでした。北がすぐに崩壊するであろうという「希望的思考」、北は悪の枢軸で悪いやつらだから、これを何とか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集団的思考」が主流を成したのです。ところが、最近、北の核問題が長期化して、北の核が高度化したために、その解決策をめぐってアメリカでも百家争鳴状態に変化しています。十人に話を聞けば十人ともそれぞれいう事がちがう有り様です。」

文教授の話はつづいた。

「アメリカの対北政策を、利益と価値の側面に分けて見ましょう。利益の側面といいますと、結局アメリカの安全保障にとって北が害になるか否か、これを見るわけです。過去は少々余裕がありました。なぜならば、北の脅威とうものが通常兵器のレベルで、在韓米軍と韓国に対する脅威という次元のものでしたから。限定的で事が起こっても防ぐことのできる、そのような脅威でした。ところが、北がノドン・ミサイルを開発するや、脅威が日本にまでおよぶようになり、さらに火星15型大陸間弾道ミサイルの発射実験に成功するや、もはやアメリカ本土に対する脅威となったわけですね。そして、通常兵器による脅威の域を超えて核の脅威となりました。本土に対する直接的脅威となった北は、相当にちがった問題ですから、もはや北がアメリカの外交政策アジェンダにおいて重要な位置を占めるにいたりました。かつてオバマ政権のときでさえ、国家安全保障戦略に関する報告書で、北に対する言及が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ところが今度はもっとも重要な問題として浮上して、トランプ政権の安全保障報告書では17回も言及されました。
二番目に、価値の側面を見ますと、アメリカは民主主義や人権の問題も非常に重視します。アメリカの民主党政権は、伝統的にこのようなイシューを軍事的脅威におとらぬほど重要にあつかいました。そして北を白眼視し、相手にしようともしませんでした。今のトランプ政権は、価値にさほど重点をおきませんが、議会は依然としてこの問題に注目します。朝米関係が容易でないのは、北の核問題一つにのみ優先順位をおいて、そこにだけ集中できるような状況でなく、民主主義、人権、脱北者、生物化学兵器にいたるまですべて関連しているためです。最近はサーバー安保の問題もあります。」

アメリカのCIAが北の終末論にこだわる理由

つぎに進行役は、アメリカにははたして北の問題に関する専門家がどれだけいるのか、また、彼らは北の状況について客観的に認識しているのかという疑問を提起した。

この問題に関して、文教授はつぎのように語った。

「2012年3月初めにニューヨークで、南北、それにアメリカ、ドイツによる非公開の会議が行われました。アメリカからはジョン・ケリー(John Fords Kerry)当時上院議員、ヘンリー・キッシンジャー元国務長官、ドナルド・グレッグ(Donald Gregg)元駐韓米大使が参加し、韓国からは私と林東源理事長、北からは李ヨンホ当時外務次官が参加しました。このとき李ヨンホ次官は、『アメリカが第二次世界大戦後国交を結んでいない国はキューバ、イラン、朝鮮の三カ国だ。ところがキューバとイランは過去に国交を結んだが断交した。一度も機会をあたえられていないのは朝鮮だけだ。これは不公平だ』とのべました。これに対してジョン・ケリー上院議員は、『よく存じている。ところが国交を結ぼうにも、上院で承認されねばならないのだ。北朝鮮が今のような姿勢では、上院議員100人中一人も賛成しないだろう。だからあなたたちが態度を変えるべきだ』と答えました。
状況を理解しやすい場面と思ってこの話をしましたが、アメリカの政治家たちは、今もこのような考え方です。状況を易地思之、つまり北側の立場も考慮しながら接近する、『内在的接近』といいましょうか、そのように考える北専門家の意見というものは、ワシントンの政界ではほとんど影響力がありません。彼らは北の行動すべてが挑発とは考えず、アメリカに原因があったり問題がある場合もあると考えます。しかしワシントンの主流は、北専門家でなく外交分野のジェネラリストたちです。北について十分な理解もしていないくせに、固定的な考え方で北を判断しようとする人々が優位に立っているのです。
アメリカの政府のなかで対北政策に影響力をもつ主な関係者は、CIAの分析局で北を担当する分析官、国務省情報研究室の北担当者、それに国防情報本部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の北担当要員らですが、それぞれ性質が異なります。国務省の場合は、比較的に客観的な分析を行う反面、CIAは北に対する敵対的分析の傾向が強いです。DIAは主に画像あるいは暗号による情報など技術的情報に依存するため、歪曲が少ないそうです。しかし、ともあれ全般的には、韓国語もできずハングルも読めないのに声だけが大きいジェネラリストがワシントンの政界を左右しているといえましょう。これが対北情報で失敗をもたらす主な原因の一つということです。

文教授の話はつづく。

「…とにかくこのようなメカニズムのなかで、アメリカの政府は最初から反北的な考えが強いCIA分析局の意見に耳を傾ける傾向があります。ドナルド・グレッグ元駐韓米大使の著書『歴史の破片たち』を見ますと、『アメリカCIAにおける最悪の情報的失敗は北に対する分析』と回顧したくだりがあります。グレッグ元大使は、1951年に大学を卒業してCIA入りし、1973年から1975年までは韓国支局長をつとめ、1989年に駐韓米大使に赴任しましたから、30年以上も韓国情報をあつかってきた人物です。北は閉鎖社会なので情報の入手がむずかしいではありませんか。それならばなおさら北を理解して真面目に勉強した専門家が必要なのに、保守的な考えで凝り固まった人々がCIA分析局で北の担当者として仕事をして、そこから出たものがホワイトハウスや国務省に伝えられると考えてごらんなさい。誤った情報が入れば誤った結論が出てくるのです。CIAは、1991年から北崩壊論を主張しました。1994年の金日成死去当時には、実に断定的に北の崩壊を予測したではありませんか。つづいて苦難の行軍の間も、当然のように北崩壊論を主張しました。最近も、北崩壊論に傍点を打っています。それゆえCIA分析局は、いつになっても、北が崩壊してこそ自らの分析が正しいと証明さねばならないと考えるのです。まるで終末を予言する人々のようです。終末論者らは、自らが予言した日になっても終末がおとずれないときに、『ああ、われわれが間違っていました』と認めたでしょうか?再び日にちを代えて、熱心に終末を説破するでしょう。」

つづいて洪議員が語った。

「ところで、それはアメリカだけでしょうか?韓国も同じです。とくに李明博政権当時手中的に見られましたが、先任者の盧武絃・金大中政権の統一政策を攻撃する際に、北専門家らに矛先を向けました。統一部を弱体化させて、外交部と統合させようとしたのも同様の次元の問題です。それでいながら、北専門家でないジェネラリスト、一般の国際政治学者らに対北政策を主導させました。結局、韓国の保守政権もアメリカも、まったく同じ方式で、北専門家でないジェネラリストを全面に立たせて対北政策に臨んできたわけです。」

彼の話はつづいた。

「もう一つ、アメリカの対北政策における大きな脆弱さは、政権が代わるたびに政策の継続性がなくなることです。アメリカの政府は大体、異例の場合を除いて、1970年代以後民主党と共和党が大統領を二期つとめて政権が代わ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ですから、どういう現象が起こったかといいますと、8年の間に1期4年は北に対する圧迫攻勢で一貫します。しかしそれがまかり通らないために、2期目に入って何らかの対話を模索して、目に見える成果をおさめようとしますが、時間切れとなって任期が終わってしまいます。これが一つ目のパターンです。
つぎに二つ目のパターンは、ほとんどの人々が北が約束をしても守らないと考えていますが、アメリカをはじめ他の周辺諸国も、北との約束を守らない事が実に多いのです。最初から約束を破ろうとしたというよりも、政権が代わるたびに自然と反故にされるのです。クリントン政権当時の1994年ジュネーブ合意もそうでしたし、2000年10月の朝米合意もブッシュ政権が登場してから2002年に破棄されたではありませんか。そのまま終わってしまいました。つぎにブッシュ政権との合意も、オバマ政権に入ってからまともに履行されませんでした。このような経験が繰り返されたために、北もアメリカを信頼しなくなりました。アメリカが北を信頼しない以上にです。」

トランプの在任期間は絶好の機会

進行役はつぎに、北の核がアメリカに対する実質的脅威の水準に到達し、また、これまでのアメリカ大統領とは相当ちがったトランプという人物が在任中という環境の変化について指摘しながら、とくにトランプ大統領の特性からしてどのような変化の契機が作られて行くかという問題を提起した。

これについて、文教授はつぎのようにのべた。

「トランプ大統領の在任期間は、北の核問題や朝鮮半島の状況を打開するうえで、新たなモメンタムとして作用する可能性が非常に高いと思います。アメリカの政界における既存の価値観からして、相対的に自由だという点ゆえに、むしろ意外な変化をもたらす可能性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彼はさらに、「そこでわれわれは、トランプ大統領の登場を北の核問題と朝米関係を解決するうえでよい機会と考えねばなりません。」とのべた。

さらに、洪議員はつぎのようにのべた。

「韓国とアメリカの大統領が、ともに政権発足初期に北の核問題で大きな危機と挑戦に直面しましたが、危機はすなわち機会です。とくによい点は、両大統領がともに任期の初期にあることです。アメリカの歴代大統領が、就任初期に北の問題を解決する機会を逃して政権が交代するとうパターンについてお話しましたが、今北の核問題による最悪の危機が解決にむかえば、任期が十分残された文在寅大統領とトランプ大統領の在任中に、北との関係を相当進展させることができましょう。」


※書籍の二部「われわれは地政学的宿命から抜け出すことができるか」中の2章「トランプ大統領は交渉可能な人物か?」より。中見出しは書籍のとおり(大東研究所所長康民華2018.8.16整理)。


일본의 대조선식민지지배는 현재진행형이다

강민화 (대동연구소 소장)

1945년 8월 15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끝났다. 필자는 8월 15일에 대해서 아예 해방기념일 또는 광복적이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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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란 본국 인구의 이주와 이주민에 의한 개척이 합쳐진 ‘코로니아’(colonia)라는 그리스어에 유래한다고 하는데, 근래에 와서는 어떤 나라 주민들이 다른 나라에 이주해서 그곳을 정복함으로써 형성되는 지역이라는 뜻으로 속령(dependency) 또는 새로 획득한 영토(territory)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실지로 16∼17세기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는 유럽 이외의 지역을 정복하여 그곳을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지배의 대상으로 삼고 식민지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식민지는  ‘이민족 지배지역’, ‘종주국에 종속된 지역’을 뜻하는 개념으로 되었다.

그런데 강제병합으로 시작된 일본의 대조선식민지지배는 이같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 피지배지역화라는 정도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 식민지지배는 그 자체가 군사력에 의해서 강요된데다가 “조선인은 일본에 복종하든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 초대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위협공갈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게 자기 영토를 점령당하고 자원을 약탈당하는 등의 정치, 경제적 종속에 머무르지 않고 주민들은 인적 자원, 즉 강제노동력이나 심지어 성노예의 운명을 강요당했으며, 심지어 조선이라는 나라와 그곳에서 형성되고 살아 온 민족의 말살까지 추구되었다. ‘창씨개명’이나 모국어의 사용금지 등 민족을 특징짓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파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수 많이 거론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 문제를 좀 다른 각도에서, 즉 일본에 의한 대조선식민지지배는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시각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 그것은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결코 저절로 과거사가 되지 않는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성의를 가지고 사죄와 보상을 해야 비로소  청산이 이루어지고 과거사가 된다. 

더욱이 우리 민족은 지금도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의 연장선상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그것이자 바로 해방후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분단에 의한 고통이다. 그래서 필자를 포함해서 우리는 8월 15일을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가 끝났다는 의미로는 해방기념일(광복절)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보면 분단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1. 조선 분단의 책임은 일본에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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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은 분단의 원인(遠因)제공자

필자는 이 글에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오늘과 같이 우리 나라가 분단되지 않았다고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보기로 한다.

일본에는 우리 나라가 분단된 책임이 일본에게도 있다고 말하면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Pace Philosophy Cantrre(캐나다 방쿠바)의 노리마츠 사도코(乗松聡子) 대표는 일본은 패전이후도 자기들이 아시아의 이웃들을 경시하고 자기들의 전쟁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면서 “조선반도의 분단과 전쟁은 일본에 의한 침략과 식민지지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해서 발생했다.”고 말했다(DAYS JAPAN 2018년 8월호).

물론 일본이 조선을 직접 남북으로 갈라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에 의한 대조선식민지지배는 북위 38도선에 의한 조선분할의 발단이 되었으며, 그것이 지금의 분단에로 이어졌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한 의미로 일본은 조선 분단의 원인(原因)아닌 원인(遠因)의 제공자이다.

일반적으로 38도선에 의한 조선 분할은 일본이 패전한후 미, 소, 중, 영 4개국의 동의에 따라 맥아더가 내린 ‘일반명령 제1호’(1945.9.2)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조선 분할은 당시  대일참전을 선언한 구소련의 급격한 조선(한)반도 남하에 불안을 느낀 미국에 의해서 입안되고 추진되었다.

1945년 8월, 미국은 일본의 패전이 이미 시간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広島 8.6)와 나가사키(長崎 8.9)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한편 이와 때를 같이 하듯 대일 선전포고(8.8)를 한 구소련은 다음날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로의 진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일본은 ‘포츠담선언’ 수락 의사를 표시(8.10)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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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 자기 군대가 아직 오키나와에 머물러 있던 미국은 구소련의 남하가 이대로 계속되었다가  자기들이 조선에 진출하고 조선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없어질 것을 몹시 우려했었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8월 10-11일에 국무성, 육군성, 해군성 합동조사위원회(SWNCC)가 긴급으로 소집되고 조선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하고 미소 양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분담하도록 할데 대한 문제가 토의되었다.

이 분할안은 당시 미 육군 참모부에 있었던 장교들인 딘 러스크(David Dean Rusk=훗날의 국무장관)과 챨즈 본스틸(Charles H. Bonesteel=훗날의 주한미군 사령관)이 명령을 받고 8월 10일, 불과 30분 사이에 입안한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회의에서 채택되고 대통령 트루만(Harry. S. Truman)의 비준을 받은 다음 구소련, 중국, 영국의 동의밑에 맥아더의 명령으로서 하달되었다.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조선을 점령했던 일본군이 최종적으로 항복한 것은 1945년 9월 9일이었다. 그후 미국과 구소련이 전후처리, 다시 말해서 항복한 일본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맡게 되었는데 38도선 이북에 있던 간토군(関東軍) 부대는 구소련군이, 이남에 있던 다이홍에이(大本営) 직할부대는 미군이 각각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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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38도선은 단순한 분담(分担)경계선으로 머물지 않았다.

결국 조선(한)반도에서는 미국의 대소봉쇄정책으로 일컬어지는 트루만 독톨린(1947.3.12)이 나오기 2년전에 벌써 미소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역사에서는 “만약에”가 통하지 않지만 만약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이 지역이 전후처리 마당이 되는 일이 없었으며, 따라서 이 전후처리 때문에 조선이 38도선 이북과 이남으로 분할되는 일도 없었다. 이 38도선은 일시적인 분할경계선으로부터 국토를 국경선처럼 갈라놓는 선이 되었으며, 훗날 전쟁을 겪은후 군사분계선이 되어 오늘처럼 분단을 고정화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이 패전하기전에 38도선에 의한 조선 분할을 이미 전에 입안했으며, 사실상 패전후의 남북 분할을 유도했다고 하는 자료도 존재한다.

일본의 역사학자 고시로 유키코(小代有希子) 교수(동아시아문제 전공)가 1999년 미국에서 활동하던중에 출간한 논문 〈범태평양 인종주의와 미국의 일본점령〉에는 일본이 패전 마지막 순간까지 ‘대동아공영권’의 훗날을 기약하며 조선(한)반도 분할을 상정하고 이를 위해서 기민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다(네이버 블로그 〈한반도의 분단, 38선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2008.12.24).

(2) 38도선 이남에서의 미 군정실시, 길 안내자는 일본이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미국이 조선의 38도선 이남(인천)에 자기 군대를 상륙시킨 것은 패전한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목적이라는 것은 한갖 구실에 불과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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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에 대통령 트루만의 특사로 아시아를 순방했던 미 육군 중장 앨버트 웨데매이어(Albert Wedemeyer)는 이해 8월 26일에 서울을 방문해서 워싱턴에 돌아가서는 트루만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미국의 전반적 이익에 위협으로 되는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주의 조선이 탄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현실적 방침은 남조선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실현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미국은 1945년 9월 인천에 상륙한 그날부터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까지도 적국민으로 대했다. 뿐만아니라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내온 인민위원회나 진보단체들을 탄압하거나 강제해산시켰으며, 나중에는 불법적으로 해방된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시키고 이남에서만의 단독선거(1948.5.10)를 강행케 함으로써 하나인 조선의 국토와 민족을 양단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엄중한 것은 이같은 미국의 군사적 점령과 조선분단이 전쟁에서 패한 일본을 길 안내자로 해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남에 주둔했던 미군의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는 1945년 9월 4일, 자기가 이끌었던 미 제24군단 장병들에게 “조선인들은 미국의 적으로 규정되며 따라서 항복에 부수되는 모든 조건을 이행할 의무를 지니는 한편 일본인들은 우리의 우호국민으로 간주한다”고 말했으며, 이 말은 그대로 실천에 옮겨졌다.

미군의 인천상륙이 시작된 9월 8일, 부두에는 총칼로 무장한 일본인 경찰이 정열했는데, 미군을 환영하는 데모에 참가했던 조선인 두 사람이 그들에게 사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데 하지는 치안유지에 협조해주었다고 오히려 일본인들에게 사의를 표시했으며, 미국인 기자에게 “본관은 민간인들이 상륙작전을 방해할까봐 그들을 부두에 접근시키지말아야 한다고 명령해두었다”고까지 말했다.

또한 다음날인 9월 9일, 일본군의 항복 의식이 끝나자 하지는 총독 아베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들과 조선인 직원들은 현직에 머무르게 하고 총독부는 자기 기능을 종래대로 수행하게 된다고 발표했다. 한편  조선인들에게는 연설을 통해서 ‘인내’를 요구했다(부르스 커밍스 〈조선전쟁의 기원〉제1권, 정경모·임철 공동번역, 1989 씨알의 힘사, 201페이지).

패전 직후의 일본에 머무르고 활동했던 미국 언론인 마크 게인(Mark Gayn)이 자기 저서 〈JAPAN DIARY〉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군은 해방자가 아니라 “상륙 첫날부터 조선인의 적으로서 행동”했다. 이는 그 어떤 나라 내정문제에도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유엔헌장(제2조, 제7항)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었다. 결국 일본은 패전국인데도 미국의 이같은 불법행위에 가담했던 것이다.

2. 일본의 과거청산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1) 일본은 조선(한국)전쟁 참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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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삼 강조하건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지배가 없었더라면 이 지역이 전후처리의 마당이 되지도 않았으며 이 전후처리가 오늘의 분단에로 이어지는 일 또한 없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반성과 과거청산은 당연히 이 문제까지 염두에 두고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당국은 과거청산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어느 하나도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있으며, 더욱이 자기들의 대조선 식민지지배가 조선분단의 원인이 된 책임에 대해서는 인정할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반성은 커녕 당시의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패전 직후 미국으로부터 원조식량이 보내오게 된 것과 관련해서 “이처럼 귀중한 식량을 쵸센징(朝鮮人)들에게 먹일 수 없으니 남이든 북이든 한사람도 남기지 말고 일본땅에서 추방해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다. 그리고 1950년에 조선에서 전쟁이 터지자 그는 “이것이야 말로 천우신조가 아닌가”고 기뻐했다.

그리고 스쳐지낼 수 없는 것은 일본의 조선(한국)전쟁에 직접, 간접적으로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일본 수상 요시다는 1950년 8월 10일에 구일본군 군인들을 모집하여 조선의 전쟁터에 보내는 한편 ‘의용군’, ‘지원대’ 등의 명목으로 무력을 편성해서 전선에 들이밀었다(노동신문 2010.2.4).

그리고 주지하는 것처럼 일본은 이 전쟁에서 ‘조선특수’라고 하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까지 챙겼다.

애당초 이 전쟁은 조선이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자기들의 식민지지배로 조선 분단의 원인을 제공했을뿐 아니라 이 분단으로 인해서 일어난 전쟁에까지 가담했던 것이다.

(2) 그릇된 정책의 근저에 깔려 있는 속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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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당국은 조선 분단의 책임이 자기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서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분단된 한쪽(남)만을 “유일합법정부”라고 하며, 또 한쪽(북)을 적대시하는 그릇된 정책에 일관하게 매달려 왔다. 결국 일본은 조선의 분단이 반세기가 넘게 장기화되도록 하는데도 스스로 가담핬던 것이다.

그들의 그릇된 정책은 1965년 6월의 ‘한일조약’에 근거하고 있는데, 일본이 미국의 지시에 따라 이 조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한국정부와 흥정을 벌이는 과정에 스스로의 속셈과 목적을 여실히 드러냈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1961.5.16) 직후인 1961년 7월 22일, 당시 미국 대통령 케네디(John Fizgerald ‘jack’ Kennedy)와 요트에서 회담한 일본 수상 이케다 하야토(地田勇人)는 “부산이 적화(赤化)되면 일본 치안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일본은 한국의 반공체제에 대해서 중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을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고 말했다(다카사키 소우지高崎宗司 〈검증 일한회담〉 1996 이와나미신서, 118페이지).

그러면서 이케다는 “박 정권이 민주주의적인 정권이 아니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겠지만,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백년하청이고 박은 이미 반공을 국시로 선언하고 있는 터인만큼 일본으로서는 박의 반공정권을 밀어줄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 피요하다면 일본은 미국을 대신해서 경제원조를 개시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한다.

그후 박정희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기해 1961년 7월 4일에 ‘반공법’을 공포했으며, 케네디는 7월 29일 박 정권을 지지할데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1965년에는 ‘한일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이 ‘한일조약’을 통해서 어떤 목적을 추구했는가를 보여주는 사실이 또 한가지 있다.

1958년 6월 11일 한일회담의 일본측 수석대표 사와다 렌조(沢田廉三)당시 외무성 고문은 회담에 임한 일본정부 대표단과의 간담회에서 “38도선을 압록강까지 밀어내고 거기에 (운명선을)설정하는 것은 일본 외교의 임무이며 또한 일한교섭의 목적이다. 38도선이 부산까지 내려 오면 일본의 앞길이 캄캄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같은 책, 89페이지).

일본이 지금도 똑똑한 과거청산도 하지 않은채 분단된 조선(한)반도의 한쪽을 인정하고 다른 한쪽은 적대시하는 것과 같은 그릇된 정책에 계속 매달리고 있는데, 그 바탕에는 ‘한일조약’에 임했던 그들의 이같은 속셈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한일관계이기 때문에 국제적인 우호친선과 거리가 먼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한일관계가 한때는 “유착관계”라고 비판받기까지 했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 ‘위안부’ 문제 등으로 식어버린 사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 실체는 사상루각과 같은 것이다. 이같은 상태에서 무슨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바락 수 있겠는가.

그러한 일본당국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화해와 단합, 통일에로 나가게 된데 대해서 좋게 생각할리가 만무하다.

대표적인 실례를 든다면 그들은 2000년 6월에 평양에서 남북 수뇌들이 만나고 6.15공동선언이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평양의 비행장에서 양 수뇌가 손을 잡은 순간, 서울의 프레스센터에서는 각국의 기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는데 유독 일본 기자들만은 기립박수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한국의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의해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이 부정되고 남북관계가 또다시 대결상태로 후퇴했을 때 안도의 숨을 내리쉬지나 않았을까.

글을 맺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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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1910년 8월 22일 저녁, 훗날에 초대 조선총독이 될 3대 통감 데라우치는 연회자리에서 “고바야가와, 가토, 고니시가 살았으면 오늘밤 저 달을 보고 무엇이라 했을고”(小早川、加藤、小西が世にあらば今宵の月をいかに見るらん)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가 이때 이름을 부른 3명은 도요도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조선침략 때 출병했던 일본의 사무라이대장들인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였다. 요컨대 데라우치는 그들이 이루지 못했던 조선정복을 자기가 해냈다고 이같은 노래를 읊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반세기 이상, 일제의 패전으로부터는 근 20년이 지난 1962년 2월에 당시 일본 수상 이케다는 미국에서 케네디를 만나고 돌아와서는 “우리 일본은 이토 히로후미(伊藤博文)의 길을 따라 다시 한번 조선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고 말했다(한겨레 2009.6.28).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지만, 반세기나 사이에 둔 두 사람의 노래와 발언이 이렇게도 흡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도요도미의 조선침략을 미화한 일제의 사고는 그후도 일본의 정부당국자나 정치가들에게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오늘까지도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려는 폭언이 되어 내뺃어지고 있다.

참으로 1970년 나치의 희생국이었던 폴란드의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에서 당시의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끓은 장면과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일본에서 현직 수상이 자기들의 과거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반성하며 사죄하겠다고 말한 것은 해방 50년만의 일이었다.

일본은 1990년 이후라야 분단된 한쪽(한국)과만 거론해 왔던 과거청산 문제를 조선과도 거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0년의 조선로동당과 일본의 자유민주당, 사회당 사이의 ‘3당공동선언’과 2002년 9월의 ‘조일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되게 되었다.

그런데 조일 양 수뇌들이 2002년에 공동선언을 통해서 이루어냈던 과거청산과 현안문제 해결에 의한 양국관계 정상화라는 약속은 일본측에 의해서 이 합의 내용의 한 측면인 현안문제(납치문제)만이 극대화되거나 과거청산이나 관계정상화가 돈문제로 왜곡되는 등 때문에 지금도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대조선 식민지지배가 분단의 원인이 된데 대한 반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뿐만아니라 최근년간 일본에서는 과거에 저질어진 죄행에 대한 반성은 커녕 “조선인(혹은 한국인) 모조리 죽여버리라”는 등의 헤이트 스피치가 백주에 거리에서 공공연히 외쳐지고 죄없는 재일동포들, 특히는 그들의 민족교육에 대해서 부당한 차별히과 압력이 가해지고 동포들은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다.

더욱이 올해들어 조선(한)반도 정세가 대화 국면에로 전환하게 되자 지금까지 오직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정책에만 추종해왔다가 ‘모기장바깥 신세’가 되고만 일본당국이지만 그들도 말로는 “조일관계의 개선”이니 “대화”를 운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자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나어린 조선고급학교 학생들이 조국에 수학려행을 가서 사온 기념품까지 일본의 비행장에서 부당하게 압수당한 사건은 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해방직후 조선에서는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은 일어선다”는 노래가 유행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불리운 노래 가운데 “일본은 일어선다”는 구절이 과연 과거사가 되었을까?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에서 쫓겨났을 때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는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면서 “나 아베 노브유키는 다시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러나 아베의 말과 함께 당시 일본의 생각은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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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일제전령하에서도 식민지 망국노의 윈명에 순종하지 않았으며, 해방후는 물론 지금도 민족의 좀엄과 자주권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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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들이 놓쳐서는 안될 것은 지난 6.15공동선언 발표이후, 특히 이번에 4.27판문점선언이 발표된 이후 재일동포들에 대해서 차별이나 탄압이 가해지는데 대해서 양심적인 일본사람들은 물론 조선(한)반도의 남북에서 항의와 규탄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사실이다.

8.15를 맞으며 새삼스럽게 강조한다. 성근한 과거청산 없이 일본의 미래는 없다.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 100년에  즈음해서 쓴 글 “일본의 대조선식민지지배는 과거사이겠는가?”(통일뉴스 2010.8.20)를 현 시점에서 다시 수정·정리했음.


(2018.8.10 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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